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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안경제조70년사

Published by PODZONE, 2022-08-29 22:19:01

Description: 한국안경제조7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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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 2015 Filmography of Korea Eyewear Manufacturing 대민국 안경산업의 살아있는 역사를 읽다


발간사 007 축사 008 연보 014 사 롤로그 030 동기 034 중기 040 기 062 침체기 094 재도약기 106 다시, 대구안경 138 안경산업 비즈니스센 eyevil 150 연 158 집기 170 目 次Filmography of Korea Eyewear Manufacturing 국안경제조 70년사 004


005


국안경제조 70년사 006


안녕십니까. 재단법인 국안광산업진원 원장 손진영입니다. 지난 2015년은 국 안경산업의 동이 이뤄진 지 70년이 되는 뜻깊은 였습니다. 대구광역시 원대동 에서 처음 시작된 국 안경산업은 그간 뛰어난 기술력과 부 노우를 바으로 눈부신 성장을 거 듭왔습니다. 대구는 세계 4대 안경생산지이자 국 안경산업을 대는 안경도시로서의 입지 를 고 다지며 국내 안경산업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이를 국 안경산업은 국내뿐만 아니라 외에서도 월 질, 독창적인 디자인을 인정받고 있 으며, 최근에는 콘렌즈와 안광기기 수출을 대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도약을 준비 중입니 다. 이러 값진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안경산업 종사자들의 땀 어린 노력과 끊임없는 연구개 발, 그리고 변없는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가능 일이었습니다. 국 안경산업의 새로운 미래를 눈앞에 둔 지금이야말로 지나온 70년의 노우와 역사를 되돌아보고, 이를 앞으로의 새로운 70년을 준비야 중요 시점이라 수 있습니다. 이번 「국안경제조 70년사」 발간은 국 안경 제조역사에 대 정 고증과 기록을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 조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실천고, 국 안경산업의 새로운 미래를 담은 청사진을 제시 는 일이 될 것입니다. 「국안경제조 70년사」의 고증과 기록을 위 기꺼이 소중 사진과 기록물을 내어주신 분들, 국 안 경제조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생생 목소리를 들려주신 모든 분들에게 다시 번 감사드립니다. 또 「국안경제조 70년사」 발간을 비롯 ‘국안경제조 70주년 기념사업’을 위 노력주신 여러 전문 가 및 안경산업 종사자 여러분에게도 지면을 빌어 감사의 인사를 전니다. 글로벌 안경업계가 국 안경을 주목는 지금, 업계와 종사자가 께 노력 저력을 보여준다면 국 안경산업이 대민국의 대적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거듭나는 날도 머지않았으리라 신니다. 저 국안광산업진원 역시 전 임직원이 마음 뜻으로 모든 역량을 결집 국 안경산업의 새로 운 70년을 여는 일에 기여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겠습니다. 감사니다. 국안광산업진원 손진영 원장 국안경제조 70년사 국안광 산업진원장 발간사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새로운 70년을 준비겠습니다 007


축사 - 산업부장관 국안경제조 70년사 008


축사 - 산업부장관 009


축사 - 대구시장 국안경제조 70년사 010


축사 - 대구시장 011


국안경제조 70년사 012


아름답고 근 계절을 맞아 「국안경제조 70년사」를 발간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드립니다. 그 리고 본 책자가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누구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이신 국안광산업진원 손 진영 원장님을 비롯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1940년대 중반부 시작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안경을 제조기 시작 것이 어느덧 70년을 맞이 였습니다.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안경산업의 발전을 위 노력 온 안경업계 선배 여러분 덕분에 안경산업은 날이 갈수록 고도되고 있으며,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자리매김고 있습니다. 물론 든 점도 많이 있습니다. 무경쟁의 시대를 맞아 FTA 체결은 물론 시장의 개방으로 인 가격 과 질, 서비스 등 모든 면에서 그 경쟁이 더욱 치열지고 있는 상입니다. 수많은 수입 브랜드 들이 내수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으로 인 안경제조업체들은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렇듯 여러 가지 요인들이 우리를 들게 고 있지만, 위기가 곧 기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 이 시기 를 발전의 발으로 삼아야 다고 생각니다. 끊임없는 기술개발을 바으로 질을 상시켜 경쟁 력을 강시는 것은 물론 내수시장에 만족지 않고, 우리나라 안경제조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수출 로 개척에 더욱 집중야 는 시기입니다. 국광공업동조도 안경산업의 발전을 위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을 약속드립니다. 70여 년 전부 안경산업을 일으켜 세우기 위 선배님들이 리신 땀방울이 더욱 빛을 발 수 있도록 조직 강 및 운영의 성를 비롯 내수시장 유질서 립, 외시장 개척을 수출증대, 공동사업 추진 등 안경산업의 미래를 밝게 열어나갈 수 있도록 조원들과 께 열과 성을 다 계입니다. 「국안경제조 70년사」는 우리나라 안경산업의 살아있는 역사를 만날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책으로 길이 남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권의 책이 지난 우리나라 안경산업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기를 제공는 것은 물론, 앞으로 관련 종사자들이 나아가야 방을 제시는 소중 지침서가 되길 바 라는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국안광산업진원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우리나라 안경산업의 비전과 가치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원니다. 감사니다. 국안광공업동조 박영 이사장 우리나라 안경산업의 비전과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기를 국안경제조 70년사 국안광공업 동조이사장 축사 013


1946 1947 1948 1949 1950 1946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 설립 초기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 전경 국안경제조 70년사 014


1951 1952 1953 1954 1955 1953 동양셀룰로이드공업사 설립 당시 공장 주변 015


1956 1957 1958 1959 1960 1960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 대구 최초로 콩에 3천불 규모의 안경 수출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에 찾아온 외 바이어 국안경제조 70년사 016


1961 1962 1963 1964 1965 1961 1962 1965 안공업사 설립 국광주식사 설립 국광안경공업동조 설립 안경제 세계시장 수출 국광주식사 베남 진출 수출 컨이너 선적 모습 017


1966 1967 1968 1969 1970 1966 1968 동양셀룰로이드공업사 중기업 시범공장 선정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 산업장 국광주식사 서울 구로공단에 안경 및 렌즈 제조 공장 설립 완제 질점검 국안경제조 70년사 018


1971 1972 1973 1974 1975 1972 국셀룰로이드공업동조 경제기원장관 창 독일 수입, 나사 깎는 기계 019


1976 1977 1978 1979 1980 1976 1980 국셀룰로이드공업동조 수출 체라이스 실시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에서 국제광으로 상변경 국제광 에시 안경 생산 국안경제조 70년사 020


1981 1982 1983 1984 1985 1982 1983 1984 1985 국광안경공업동조 우수제조수출업체로 삼성공업 선정 국광안경공업동조에서 국광공업동조으로 명칭변경 국광공업동조 대구에 분소 설치 국광공업동조 안경수출질서위원 발족 중소기업고유업종 지정 아세아광 신제 ‘마이다스TX’ 생산 안경산업 종사자들 021


1986 1987 1988 1989 1990 1987 1988 1989 1990 국제아스공업 이니켈 소재 안경 개발 삼성공업사 안경 본격 생산 안경사국가자격시 시 서전, 루늄 안경 국내 최초 개발 내수매용 안경 질인증제도 실시 국제광 경북 경산에 안경공장 준공 안경 생산 서전 미국 지사 설립 안경 세계일류상 지정 대구시 수출전략상 지정 국안경제조 70년사 022


1991 1992 1993 1994 1995 1992 1993 1994 1995 안경매조 창립 초대이사장 김남 성보상사 사장 전국안경인의 설립 서전안경, 뉴욕비전엑스 인기1위 차지 안경 KS산업규격 개정 대구광역시 지역산업으로 지정 ㈜세광 안경제조업체 최초 ISO9002 득 외 바이어와의 담 023


1996 1997 1998 1999 2000 1996 1997 1998 1999 2000 안경 가격시제 시 금보기술산업 안경도금업계 최초 ISO9002, KS A9002 최상등급 득 정부관리업종 지정 뉴욕광박람에 8개사 참가 안경 제조 남북경사업 추진 대민국안경디자인공모전 개최 KIST고석근박사 물방울제거기술 개발 성산업 나무안경 국내 첫 개발 쉬메릭(대구지역공동상) 본격 출발 유레카광 늄용접기 국내 최초 개발 안경제조의 의모습 국안경제조 70년사 024


2001 2002 2003 2004 2005 2001 2002 2004 2005 대구전시컨벤션센 건립 수출 1000만불 수상 대구국제안경전 DIOPS 1 개최 지역연고산업 육성사업으로 육성 시작 컴전자 방지 안경 사이버글라스 출시 (재)국안경산업지원센 건립 안경제조공장 전경 025


2006 2007 2008 2009 2010 2006 2008 2009 국안경광전시(EXPOLOOK) 개최 대구 북구 노원동, 침산동 일대 대구안경산업구 지정 대구 북구 노원동, 침산동 일대 안경거리 조성 대구안경산업구 지정 국안경제조 70년사 026


2011 2012 2013 2014 2015 2014 2015 안경산업비즈니스센 착공 ㈜시선 TWO-FACE아이웨어 2014레드닷 디자인어워드 수상 지역연고(전)산업육성 사업 선정 안경산업비즈니스센 ‘아이빌’ 완공 eyevill 전경 027


안경에 대 최초의 기록 우리나라에 안경이 처음 등장 때를 알려면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다. 구체적으로 이르자면 광군(光海君, 재위1608~1623) 시절이다. 『지봉유설(芝峯類說)』은 지봉(芝峯) 이수광(李晬光, 1563∼1628) 이 1614년(광군6년)에 찬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식 저서이 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안경이 임진왜란(1592~1598) 때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내용이 등장다. 자세 살보면, 「권19」에 ‘임진왜란 당 시 명나라 고관 심유경(沈惟敬)과 일본 승려 소(玄蘇)가 모두 늙은 사람임에도 불구고 안경을 쓴 덕에 잔글씨까지 거뜬 보아 넘기니 좌중이 놀랐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보지 못던 일이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지만 안경에 대 여건은 이 2백여 년이 더 르는 동안에도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 것으로 보인다. 그저 극 소량으로 생산되어 일부 계층에만 보급되다가, 영조(英祖, 재위1724∼1776) 대에 이르러 서야 조금씩 발전기 시작 때문이다. 그리고 정조(正祖, 재위1776∼ 1800) 대를 거치면서 점차 일반적으로 보급되기 시작는데, 그에 걸 맞게 조선왕조실록의 『정조실록(正祖實錄)』에 실록 상 처음으로 안경 이 등장다. 「52권」의 23년(1799, 기미·己未) 7월 10일 병인(丙寅)일 에 기록된 첫 번째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上曰, 予之眼視, 漸不如前, 經傳文字, 非眼鏡則難以辦認, 而眼鏡 乃二百年來初有之物也, 帶此臨朝, 有駭觀瞻. 近有日記文蹟考見之事, 而亦難如意披閱.” 이를 이면 다음과 같다. 롤로그 ~1945년 국안경제조 70년사 030


“상이 이르기를, 나의 시력이 이전보다 점점 못져서 경전의 문 자는 안경이 아니면 알아보기가 어려우나, 안경은 2백 년 이 처음 있는 물건이므로 이것을 쓰고 조정에서 국사를 처결다면 사람들이 이상게 볼 것이다. 요즘 일기 등 문서를 상고 볼 일이 있었는데 역 시 마음대로 어보기가 어려웠다.” 지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안경이 나라의 지존에게 도움 을 주고 있었을 정도로 인정받은 물건이기는 으나, 바로 그 지존마 저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 착용을 마음대로 지 못을 만 안경을 부담스러워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고 안경이 어느 정 도 보의 물꼬를 기 시작 것은 사실이어서, 정조 대의 자 이 덕무(李德懋, 1741~1793)가 그의 저서『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 ‘안 경의 종류가 무려 30종이 있다’고 기술기도 다. 물론 보라고 서 일반 농상민(農商民)들까지 접근 수 있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안경 나의 값이 웬만 기와집 채와 맞먹었기 때문에 일부 부유 양반계층에 뿐이었다. 따라서 재 남아있는 그 시절의 실물 안경 또 양반의 것이다. 조선 선조(宣祖, 재위1567∼1608) 시대에 신부사로 있으면서 임진 왜란 직전인 1590년에는 일본을 다녀오기까지 봉(鶴峯) 김성일 (金誠一, 1538~1593)이 사용던 것으로, 14대손인 매월당(梅月堂) 김 시습(金時習, 1435~1493)의 손이 가보로 보존고 있던 것을 경북 안동시 서면 금계리에 소재 김시습의 자에서 발견다. 故김재수옹의 가족사진 031


일제 치에서의 안경 이 안경에 대 기록은 별다르게 나나지 않지만, 가지 사 실이 「서울6백년사 연」에 간신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대제 국 융(隆熙)4년인 경술년(庚戌年), 즉 1910년 4월에 ‘중부(中部) 전 동(典洞)에 거주는 박경천(朴景千), 박두천(朴斗千)이 양경상(洋 鏡商會)를 설립, 신식 안경을 제조여 서양 수출을 목적으로 서양인 과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중부 전동은 재 서울 종로구 견 지동, 종로2가동, 공동에 걸쳐 있던 마을이며, 박경천과 박두천은 이름으로 미루어 제지간으로 짐작된다. 지만 양경상에 대 더 이상의 정보는 없는 상이다. 그런데 1910년 8월 경술국치, 즉 일 방 직에 서울 종로에서 중국으로부 재료를 수입여 안경을 만 들었다는 사실이 추가로 인된 것을 보면, 양경상와 관련이 있 는 것은 아닐까 다. 물론 이는 심증에 의거 추측일 따름이다. 이 안경업은 일본이 문정책을 기 시작 1920년부 1930 년대 중반까지 전국에 걸쳐 성 되었다. 일본인들에 의 설립된 업체에서 안경을 제조 것인데, 사실은 완제에 이르도록 전 부 을 만든 것이 아니라 다만 소규모 가내공업을 렌즈를 연마 수 준이었다. 지만 일본 내에서 우리의 실력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대 적인 예로 1930년대 반, 일본의 오사카에 ‘금곡셀룰로이드공업사’ 라는 소규모 안경공장이 김재수(金在銖) 장에 의 설립, 운영된 것 이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 등장는 김재수 장이 바로 날 ‘국제셀 룰로이드공업사’의 창업자, 바로 그이다. 그는 오사카에서 공업교를 졸업 뒤 쿠이 의 안경공장에 입사여 안경제조 기술을 배운 였다. 그러던 1941년, 양전쟁이 발발다. 양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의 일부로 1945년까지 일본과 연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그런데 이 전쟁 때문에 안경제조업체들이 거의 쇄되었다. 국안경제조 70년사 032


다만 일본 군인들이 사용는 안경을 납는 정도로만 그 명맥을 유지 뿐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김재수 장도 본거지를 오사카에 서 자신이 기술을 배웠던 쿠이 으로 옮겼다. 쿠이는 눈이 워낙 많아 바깥 동이 어려운 관계로 가내공업이 발달 곳이었다. 안경도 그에 속다.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던 1945년 3월, 일본의 전 가능성이 선 명게 감지되기 시작다. 그러자 김재수 장은 그대로 있다가는 우 리나라에 안경제조 기술을 이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였다. 이에 그는 원자재를 공장의 주요 기계와 기구들을 경북도 성진을 자신의 고인 경북 선산(善山)으로 모두 옮겼 다. 일본 땅에서 기술과 기구를 빼내온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 었으나, 김재수 장은 국에 나가서 전쟁에 요 군수을 만들 겠다고 으로써 일본으로부 가를 받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귀국 선산에 자리를 잡은 김재수 장은 새로이 안경제 조를 시작였다. 지만 순전 수작업인데다가 전기도 들어오지 않 는 등 경이 너무나도 열악다. 당시 김익수(김재수 장의 동생)의 처남인 김지(날 삼성공업사, 삼성광 설립) 장의 집이 전기가 들어오는 정미소를 운영고 있었던 덕분에 잠시 그곳에서 연마 기계 를 돌리기도 으나 언제까지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제조 수는 없 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일본서 들여온 원자재마저도 모두 고갈이 되어 갔다. 이는 충분 예견된 일이었다. 광복 이 안경 구 길은 완전 차단된 상에서 제은 어찌나 귀지 만들자마자 려나갔기 때 문이었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지만 당시만 도 국 내 수준으로는 셀룰로이드와 같은 성수지의 생산이 불가 실정이 었다. 이에 김재수 장은 ‘인조’이라는 서울의 셀룰로이드재 생공장과 더불어 난국을 개려고 다. 그런데 그만 ‘인조’에 불이 나는 바람에 그마저도 여의치 못게 되었다. 결국 김재수 장 은 대구로 다. 대민국 안경제조 70년 역사의 서막이 열리고 있 었다. 033


동기 1946년~ 1950년대 말 1. 역사의 시작, 1946년 국 안경산업의 시,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 방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은 1946년 3월, 어수선 시국의 가운데에서 대구 침산동에 우리나라 초로 안경 제조공장이 설립 되었다. 바로 ‘국제(國際)셀룰로이드공업사’로, 대는 앞장에서 언급 대로 김재수(金在銖) 장이었다. 그런데 고 많은 장소 중에 침 산동이 낙점된 이유는 단순다. 당시만 도 침산동엔 아무것도 없었 기 때문에 땅을 구기가 비교적 쉬웠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지 짚고 넘어가야 것이 있다. ‘국제셀룰로 이드공업사’가 설립된 장소를 두고 어느 기록에서는 침산동(砧山洞) 이라 고 어느 기록에서는 원대동(院垈洞)이라고 다는 점이다. 그 런데 침산동(1949년 대구부가 대구시로 명칭이 변경되고, 1938년 설 치되었던 북부출장소가 1963년 북구로 승격되면서 대구시 북구에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 故김재수 장 국안경제조 70년사 034


입)과 원대동(침산동과 같은 과정을 거쳐 1963년 서부출장소가 서구 로 승격됨에 따라 대구시 서구에 입)은 재 정구역 상 각각 북구 와 서구에 속 있기는 나 실제로는 길 나를 두고 마주보고 있어 생권역이 같으므로 동네나 마찬가지라고 수 있다. 게다가 ‘국 제셀룰로이드공업사’가 그 두 동네에 걸쳐서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 문에 침산동과 원대동이 용되고 있는 것이다. 원자재 난 극복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는 공장 설립과 더불어 원자재 보에 나 섰다. 바로 재생셀룰로이드였다. 일본에서부 재생셀룰로이드에 대 정보를 가지고 있던 김재수 장은 직접 제조를 시작다. 당시 셀 룰로이드는 어, 빗, 삼각자 등 많은 제의 소재여서 고물상을 수집이 가능던 것이다. 그렇게 원자재를 결 김재수 장은 안경 생산에 본격적으 로 돌입다. 초기였던 만 직원도 40~50명 정도로 많지 않았고 도 가내공업에 가까웠지만, 안경 생산이라는 분야 자체가 워낙 귀던 데다가 비교적 뛰어난 기술을 바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 로도 꾸준 성장을 거듭 수 있었다. 물론 당시로서는 뛰어난 기술이라고 도 초기의 안경 생산 공 정은 무척 단순다. 우선, 자 의 셀룰로이드 원을 재단여 렌즈가 들어갈 위치에 칼집을 낸 그것을 가열된 상로 만든다. 그 035


리고 다듬이 방망이 같은 둥근 을 칼집 난 곳에 밀어 넣음으로써 동그랗게 늘인다. 그런 다음 거기에 다리를 따로 부착시는 것이다. 따라서 6.25 발발 때까지 국내에서 생산된 안경는 모두 동그란 일 수밖에 없었다. 국 안경업계 시장의 생성 이렇듯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를 안경가 차근차근 생산 되는 동안, 국내 안경산업 시장에는 두 가지 상이 나났다. 첫째, 일본에서 안경 제조 기술을 익 그대로 취업을 고 있었거나, 안 경과 관련된 소규모의 공장을 운영고 있었거나 는 등으로 일본에 체류고 있던 국인들이 일본 망의 영으로 속속 귀국기 시작 다는 것이다. 강중(康中華), 정안근(鄭安根), 최용(崔龍鶴) 등이 대적인 인물로, 날 강중는 1930년 양시에 ‘동양안경원(東洋 眼鏡院)’을 설립 질이 뛰어난 렌즈를 제작였고, 정안근은 안 경제조와 유 분야에 종사였으며, 최용은 1935년에 양 안백 점에 ‘야운당안경원’을 개설 양질의 렌즈를 생산였다. 그리 고 둘째, 국내는 국내대로 일본인이 철수나간 유업계가 차츰 정 리, 안정되어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손으로 안경사의 새 장을 열어갈 꿈을 우던 즈음, 6.25가 일어났다. 선글라스의 유이 시작되던 1950년대 국안경제조 70년사 036


2. 전쟁과 망 6.25와 안경산업 6.25 발발 이, 안경업계에는 두 가지의 상이 나나게 되었다. 첫째, 전쟁의 를 입지 않은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안경 생산 업계가 성되었다. 안 그래도 대구는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가 설립 된 안경 생산의 선구자적인 곳이었다. 그러니 대구로 몰려든 안경인 들이 김재수 장의 보와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의 발전을 눈앞에 서 인고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 난지인 부산 지역에 안경전문 유상가가 성되었다. 6.25 이전까지만 도 대규모의 도매상들을 안경 관련 기자재가 보급되었지만, 전쟁으로 인 유체제가 무너지자 자연스럽게 안경 전문 유상가가 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안경전문 유상가는 국 제시장의 시가 되었다. 선글라스의 대유 6.25 중에 선글라스 붐이 일어나면서 안경업계는 때 아닌 성 수기를 맞기도 다. 미군들의 영이었다. 난생 가운데에서도 경 제적으로 여유가 되는 사람들은 선글라스를 구입서 끼고 다녔다. 어 찌나 유을 던지 국내에 남아있던 재고까지 모조리 쏟아져 나온 이었다. 군인들이 좋아던 스모그색의 가 주류를 이루었 으며, 그밖에 색 도 많이 애용되었다. 물론 가격은 만만치 않았 다. 당시 쌀 가마니가 5만 ( 圜)이었는데, 선글라스는 200 정도 가 보이었다. 남겨진 자들의 몫 1953년 7월, 문점에서 유엔군 사령관과 공산군(북군과 중공 군) 사령관 간에 전이 조인됨에 따라 일단 전쟁은 끝이 났다. 지만 삶의 전은 가 된 였다. 이러 사정은 안경업계에 종사고 있던 이들이라고 다르지 않아서 진로를 바꾸는 등 모두 고전을 면치 못다. 그래도 좌절만 있던 것은 아니어서 여기저기서 새 일을 도모 037


기 시작는데,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두 사람 있었다. 바로 노병진(盧炳辰) 장과 김석주(金錫周) 장으로, 노병진 장은 1953년 설립된 ‘동양셀룰로이드공업사’의 창립자이고, 김석주 장은 1961년 설립된 ‘국광주식사(韓國光學株式會社)’의 창업자이다. 김석주 장의 경우, 1954년 서울 충무로에 ‘광안경원(光學眼 鏡院)’을 개원고, 1년 인 1955년 렌즈 연마 시설을 설치여 안경 을 제조, 생산기 시작는데 이 제을 주미군 PX에 납면서 새로운 로를 모색 결과 ‘국광주식사’의 설립을 이루게 되 었다. 동양셀룰로이드공업사 생 1953년, 대구 북성로 입구에서 안경원을 운영던 노병진 장이 대구 칠성동(七星洞, 이 또 침산동이나 원대동과 마찬가지로 북부 출장소가 1963년 북구로 승격되면서 대구시 북구에 입)에 ‘동양(東 洋)셀룰로이드공업사’를 설립다.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에서 근무 다가 독립 나온 노종옥, 김국진의 기술과 관서청에서 근무던 유모씨(某氏)의 자금이 을 결과였다. 국제셀룰로이드사 국안경제조 70년사 038


이로써 셀룰로이드 성수지를 중심으로 안경의 생산은 전 성기를 맞기에 이르렀다. 지만 ‘동양셀룰로이드공업사’는 1975년 10월 21일, 스위스에 수정시계유리 1천5백 달러어치를 수출다는 동 아일보 기사를 마지막으로 언론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1980년 대 말, 결국 문을 닫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선은 자금난이 있었고, 다음으로는 당시 렌즈 공장을 께 고 있었던 상에 의거, 안경 제작보다 공정이 수월던 렌즈 쪽으로 길을 잡은 도 있었다. 또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가 친인척들로 계구도가 이어져 명맥을 이 어간 것과는 달리 ‘동양셀룰로이드공업사’는 가업을 제대로 승계지 못는 바람에 지부지되었다는 견도 있다. 그래도 둘째아들이 재 ‘동양렌즈’를 운영으로써 안경 유전자를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또 나 재미있는 사실은, 노병진 장을 도와 ‘동양셀룰 로이드공업사’에서 안경 디자인과 제작을 던 이가 당시 같은 집 안의 자였던 노병덕이었는데, 그의 손자 노진성이 지난 2009년 3D안경을 아이으로 잡고 ‘인니제이앤엘’을 설립다는 사실이 다. 게다가 창업 1년 만에 4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단번에 촉망받는 벤 처기업으로 떠올랐으며, 그것이 영감독의 길을 접고 뒤늦게 들어서 서 이루어낸 결과라고 니, 엄밀 말자면 3대 째 가업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라고 수 있다. 선진시설 견 039


중기 1960년대 초~ 1970년대 말 1. 줄을 이은 제조사 설립 안경 소재의 변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국내 안경는 디자인과 소재에 있어 변 를 맞이게 되었다. 무엇보다 소재 면에서 성수지 중심이던 것이 세계적으로 금속제 위주로 전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영을 받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전까지 금속제 안경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지만 예전의 금속제 안경는 금이나 백금 등의 귀금속을 이용여 만 든 고가이어서 그 수요가 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금속제 안경는 귀금속을 사용지 않으면서도 귀금속으로서의 위를 유지기 때문 에 그 수요는 곧 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김주(金和柱), 안식(安興植) 등이 금속제 안경 제작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김주는 안북도 운산(雲山) 출신으로 6.25 때 난여 안경업계에 신였는데, 때 교직에 종사기도 서 인지 초기에는 안경보다는 생들이 사용는 광기기의 생산에 더 전념여 대경 등을 제작, 보급기도 다. 그리고 안식은 ‘안 공업사’를 설립였다. 이처럼 김주와 안식의 보에 자극을 받은 ‘국제셀룰로이드공 업사’와 ‘동양셀룰로이드공업사’가 생산라인의 일부를 금속제 안경 로 전으로써 금속제 안경가 국내 시장에 점차 보되기 시작 다. 금속제 안경를 선도 두 제조사의 설립 1961년 3월, 안식(安興植) 대에 의 ‘안(安興)공업사’가 설 립되었다. 사실 안식 대는 1950년대부 소규모 수공업을 안 경 부속 등을 제작여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와 ‘동양셀룰로이 드공업사’에 꾸준 납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안경 소재가 금속 제로 전되는 시기에 맞추어 새로이 ‘안공업사’를 설립 금속제 국안경제조 70년사 040


안경를 생산기 시작 것이다. 당시 ‘안공업사’에서 제조 금 속제 안경는 스인리스스을 레스 공정으로 찍어내는 로서 저렴 가격을 유지기 때문에 당시 시장에서는 ‘안공업사’의 금속 제 안경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 같은 달 28일, 김석주(金錫周) 대에 의 ‘국 광주식사(韓國光學株式會社)’가 설립되었다. 주식사였기에 주 주는 김관주(金官周), 김정배(金正培) 등으로 구성되었다. 김석주 대 는 1954년에 서울 충무로에 ‘광안경원’을 경영기 시작면서 안경 과 인연을 맺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기반을 닦아나가던 중 안경제조 방식이 안경와 렌즈로 나뉘어 제각기 따로 생산되는 에서 야 다고 단고 꾸준 사업을 장시 결과 ‘국광 주식사’의 설립을 이룬 것이다. 이 ‘국광주식사’는 금도금 안경에 주력, 안경 시장에 영력을 끼쳤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김석주 대는 1983년 2월에 ‘국광안경공 업동조’의 이사장으로 선출된 바 있으며, 1986년에 ‘대안경인 ’가 『국안경사대관(韓國眼鏡史大觀)』을 발간 당시에는 ‘대안 경인’의 장이기도 다. 공장 작업 전경 041


번식을 시작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 1961년 ‘안공업사’와 ‘국광주식사’의 설립 이, 국내에 존재던 안경 제조업체로 어디어디가 있었는지 살보면, 1968년 에 기사된 내용에 당시 안경를 제조는 업체로 대구의 ‘국제셀 룰로이드공업사’와 ‘동양셀룰로이드공업사’, 대전의 ‘삼보산업’, 부산 의 ‘부산셀룰로이드’를 비롯 6~8개 사가 있었다고 언급 부분이 나온다. 그런데 당시 대구 외의 지역에 있던 업체들은 아무래도 입지 여건 상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부과 같은 기반산업이 다 대 구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업계는 1960년대 반으로 들어서면서 분주지기 시작 다. 독립과 창업이 잇따라 이루어지면서 번식을 시작 것이다. 첫째,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 김재수 장의 동생인 김익수의 처 남으로,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에서 10여 년 동안 생산반장과 공장 장 등을 역임 김지(金芝煥) 장이 독립 1968년 ‘삼광’을 설립 다. 지만 김지 장은 1972년에 다시 번 창업을 게 되었다.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에서 나온 김익수와, 마찬가지로 ‘국제셀룰로 이드공업사’에서 공장장을 지낸 윤진배 대와 더불어 ‘삼성공업사 (三成工業社)’를 세우게 된 것이다. 세 사람이 마음을 모았다 여 이 름도 삼성(三成)이었는데, 창업 과정에서 윤진배 대가 빠져나가면 서 ‘삼성공업사’는 2인 체제로 진이 되었다. 그러다가 1974년에 김 익수가 부도 위기를 맞은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에 복귀(생시 이 사망)면서 김지 장 단독체제가 되었다. 이때 김지 장 은 당시 ‘동양맥주(OB)’에 다니고 있던 김익수의 아들 김성을 영입 께 기 시작다. ‘삼성공업사’는 날로 발전다. 때는 대구 지역에서 개인사업체 로는 세금을 두 번째로 많이 냈을 정도였다. 이에 김지 장은 ‘삼 성광주식사’를 별도로 설립 운영에 들어갔다. 이 두 사는 1995년에 들어서면서 ‘삼성공업사’는 김성 대 체제로, ‘삼성광’ 은 김지 장 체제로 완전 분리되었다. 김지 장은 ‘삼성광 ’과 더불어 ‘렌즈’도 께 운영면서 선글라스와 돋보기를 생 국안경제조 70년사 042


산기도 다. 둘째, 비슷 시기에 이(李台夏) 대가 수출을 다는 조건 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 ‘코도광’을 설립다. 이 대는 종로 에서 가구사를 던 이로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나 ‘동양셀룰로이드 공업사’ 출신은 아니었지만 기술진은 양쪽에서 배출 사람들로 구성 였다. 대적인 인물이 날 1980년대 초에 ‘삼양공업사’를 창립 는 장원 대로, 장 대는 1967년에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에 입 사여 생산관리를 담당다가 ‘코도광’의 설립 멤버가 된 경우이 다. 그리고 1983년에 ‘삼원산업사’를 창업는 곽순 대는 ‘동양셀 룰로이드공업사’에서 근무다가 ‘코도광’에 몸을 담은 경우이다. 그런데 ‘코도광’이 장되는 과정에서 얼마간의 무리가 발생기도 다. 당시 ‘동양셀룰로이드공업사’에서 에시 안경를 개발 노병 를 이 대가 스카우 1974년 ‘대구광’을 설립에 따라 ‘동양셀룰로이드공업사’와 마찰을 빚은 일이 그것이다. 셋째, 1969년, 일작사인 ‘국공(共和)안경주식사’가 설립되었다.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의 전무였던 신(申鉉鎬) 대 가 국 측 주주였고, 재일교 강윤생(일본명: 오시로) 사장과 일 본인 가몬겐지가 일본 측 주주였다. 강윤생 사장은 ‘국제셀룰로이드 공업사’의 김재수 장과 마찬가지로 쿠이 에서 안경업에 종사 인물이다. 구체적으로 사바에(鯖江)에서 ‘대성안경제작사’라는 업체 를 운영 것이 바로 그것이다. ‘국공안경’은 일작사 답게 생산 제의 전량을 수출다는 조건으로 사업 승인을 얻었기 때문에 ‘국공안경’에서 생산된 안경는 ‘일본공안경’에서 수 입였다. 이로써 일본 매와 수출기반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 고 이는 1972년의 ‘대광’과 ‘대이산업’설립으로 이어졌다. 넷째, 1969년, ‘동양셀룰로이드공업사’의 설립 멤버였던 노종옥과 김국진이 따로 독립 나와 ‘대왕셀룰로이드’를 설립다. 043


이로도 번식은 계속서 이어졌다. ‘국제셀룰로이드공업 사’의 경우에는 보다 더 발 배출이 이루어졌는데, 앞서 ‘삼성공업 사’ 창립 과정에서 빠져나가 ‘진셀룰로이드(진안경공업사 전신)’ 를 창립 윤진배 대와 ‘전산업(韓田産業, 서 전신)’을 창업 신 대가 국제 출신임은 이미 언급 바 있으며, ‘대동광’ 의 김동 장의 경우에는 김재수 장의 인 김수의 아들로 총 무과장과 상무 출신이다. 그 외에도 ‘시선’의 장지문 대와 ‘아이디자 인즈’의 윤달 대, ‘보라광’의 조성 대, ‘제일광’의 전규원 대를 꼽을 수 있다. 그리고 ‘동양셀룰로이드공업사’의 경우에는 ‘삼원산업사’의 곽순 대와 ‘성산업사’의 박영 대를 배출다. 그리고 ‘유진광’ 송준용 대의 경우에는 ‘동양셀룰로이드공업사’ 출신으로 알려져 있 으나, 동양에서 근무 것은 아니고 당시 친구인 권모씨(某氏)가 동양 에서 전무로 있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동양셀룰로이드공업사’의 지 원을 받아 설립되었다. 지만 1968년과 1969년에 걸쳐 꺼번에 설립된 업체들이 바로 생산에 돌입던 것은 아니었다. 기계발주와 시제생산 등으로 준비 다가, 1971년 일본과 미국에서 기계가 온전 들어오고 난 1972년 초반부 본격적인 생산이 이루어졌다. 국제셀룰로이드 공업사 전경 국안경제조 70년사 044


안경제조업의 중심지로 부상 대구 이렇듯 안경제조 산업 분야에 있어 눈에 띄는 상은 대구 지역의 부상이었다. 그런데 대구 지역에서 안경 산업이 발달게 된 계기로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대구 지역의 유리 입지여건을 들 수 있다. 사실 대구는 반도 동남부 지역의 중추적인 역을 수 성장거점도시이다. 지리 적 여건이 방사적인 국로 인 일찍이 전국 각지와 연결되는 전국 교체계의 요충지로서 자리를 잡아 경공업인 섬유산업, 우산·양산 제 조, 염색공업 등이 발달 였다. 둘째, 안경산업의 성에 기인다. 안경산업은 약 260여 공정에 달는 전체 공정 중에서 개개업체가 일부분씩만을 담당고 있기 때 문에 지역에 모여 있는 것이 유리다. 그런데 대구에는 이미 6.25 동란 시기부 안경제조와 관련된 업체들이 나둘 몰려들고 있었다. 즉 1960년대 반으로 들어가면서 ‘삼성공업사’의 모가 되는 ‘삼광’ 과, ‘코도광’, ‘국공안경’등 중소규모의 공장 4∼5개 업체가 설 립됨과 동시에, 이들 업체의 청업체를 중심으로 40여개의 소규모 력업체가 입지 것이다. 따라서 대구에는 이미 도금업 등 안경제조 와 관련된 산업이 지역에 비 양다. 셋째, 게다가 안경산업은 1960년대 이 박정 정권이 자신의 정 치적 고인 대구 지역에 경공업 지원정책 및 노동집약적 산업 위주의 수출주도정책을 내는 등 정부 주도의 적극적인 정책에 입음으로 써 의 성장세를 지속 수 있었다. 045


2. 1960년대의 외수출 도약의 발을 마련다 1960년 극도로 부 정권을 무너뜨린 4.19에 이어 이듬인 1961년에 5.16을 맞은 우리나라에는 1962년부 1966년까지의 기 간 동안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이 실시되었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은 모든 사의 경제적인 악순을 과감 시정고 자주경제를 달성기 위 기반을 추구으며, 구체적으로는 ‘전력·석·정유 등 에너지 산업의 개발’, ‘농업생산의 증대’, ‘에너지 산업 등 기간산업 의 충과 사간접자본의 충·강’, ‘유자본의 용’, ‘수출 증대 를 도모는 국제수지의 개선, 기술의 진’을 계였다. 실제로 이 계이 실시된 5년 동안 GNP의 연균 성장률은 8.3%로, 계 착수 연도인 1962년의 3.1%에 비교면 실로 놀라운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국민 1인당 GNP 또 계 실시 전인 1961년 고작 4천만 달러였 던 것이 여섯 배나 신장으로써 경이적인 성과를 기록다. 그런데 이 무렵의 구가 ‘증산·수출·건설’이었다. 이처럼 정부의 외자도입에 의 설비자와 께 값싼 노동력을 용고자는 정부의 경공업지원정책에 입어, 전적인 노동집약 적산업인 안경제조업계도 생산시설을 충고 유체계를 정립는 등 내적인 기반을 다짐으로써 게 성장였다. 또 1962년 5월에 안 경제조업체를 중심으로 ‘국광안경공업동조(1984년, 국광 수출 컨이너 선적 모습 국안경제조 70년사 046


공업동조으로 명칭 변경)’이 설립되면서, 업계 발전을 위 정책대 안을 모색고 수출지원을 가속는 데 기여다. 이는 1963년 4월 11일자 경신문에 실린 기사에 의서도 인 수 있는 바이다. 당시 수출 진과 중소기업 육성에 대여 시리즈 로 연재된 기기사에 의면 ‘안경 4개 업체로서 인자본 82%인 데 원료의 수입의존도와 운전(運轉)자금부족으로 애로가 있으나 원료 가 국내 생산된다면 외시장 개척단계인 안경는 유망 수출산업 이다’라고 고 있다. 여기서 안경 4개 업체란 ‘국제셀룰로이드공업 사’, ’동양셀룰로이드공업사‘, ‘안공업사’, ‘국광주식사’를 이를 것이다. 그리고 이 중에서 ‘동양셀룰로이드공업사’의 경우에는 1966년 6월, 상공부에서 중소기업경영리의 일으로 실시고 있던 수출 중소기업시범공장제도에 선정되기도 다.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의 첫 수출 창업 내실을 다지기에 충실였던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의 김재수 장은 우리 안경 생산업계가 내수시장에만 급급 것이 아니 라 미래를 위서는 외시장 또 개척야 다는 단 에 외국의 바이어들과 꾸준 교섭을 벌이기 시작다. 그 결과 1960년, 콩에 3 천달러 규모의 안경를 수출으로써 수출의 물꼬를 다. 이는 1963 년에 소액의 안경를 처음으로 안경를 수출다는 다른 기록과 일 치지 않기는 지만, 그 무렵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가 콩에 안경 를 첫 수출다는 점은 기정사실이다. 그리고 김재수 장의 노력은 다스럽게도 좋은 결실을 맺어서, 수출 안경가 외국시장에서 인 정을 받아 주문이 계속 쇄도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가 국내 경제에서 차지 위상과 외 시장을 김재수 장의 관심은 1967년 11월 23일자 매일경제 에 ‘김재수 씨(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 대이사) 시장개척 차 약1개월 간 일정으로 미국에’라는 동정이 기사됨으로써 드러나기도 다. 또 이에 대 공을 인정받아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는 1968년 3월에 047


산업장(産業褒章)을 받기도 다. 산업장은 산업의 개발 또는 발전 에 기여거나 실업(實業)에 정려(精勵)여 그 공적이 뚜렷 자, 또 는 공장·사업장 기 직장에 근무는 근로자로서 그 직무에 정려여 국가발전에 기여 공적이 뚜렷 자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국광주식사의 베남 진출 설립 당시 직원 16명 정도로 시작 ‘국광주식사’는 서울 남 대문로 5가에 50여명의 직원을 보유 소규모 공장을 설립 데 이어, 1965년 베남전 병을 계기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광 안경원’을 운영 당시 미군PX에 안경을 납던 일이 인연이 되어 베남 시장에 진출, 베남에 주둔는 미군들을 상대로 안경을 매 게 된 것이다. 베남 시장에 진출게 된 ‘국광주식사’는 사 이공을 중심으로 미군이 주둔는 24개 지역에 우리의 인력을 견 여 매동을 전개고 렌즈 가공 공장을 사이공과 다낭 등지에 세웠 다. 그리고 1968년 8월에는 서울 구로공단에 800여명의 종업원이 동 시에 작업 수 있는 대단위의 안경 및 렌즈 제조 공장을 설립였 다. 안경와 께 렌즈가 일괄 공정으로 생산될 수 있는 공장을 설립 겠다는 김석주의 오랜 집념이 마침내 실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 이러 성공에 입어 1970년대에는 1백90만 달러를 수출기도 였다. 베남 시장에 진출 ‘국광주식사’가 1965년부 1970년 에 이르기까지 베남 지역을 수출 실적은 도와 같다. 살보 면 1965년에 10만 달러가 채 안 되던 수출이 3년 뒤인 1968년에 10배 가 넘는 100만 달러를 넘기더니 1970년에 이르자 무려 190만 달러를 수출으로써 20배의 실적을 이룬 것을 볼 수 있다. 경이로운 성장이 었다. 국안경제조 70년사 048


국광주식사 수출실적 자료: 국광주식사 (단위 : US$ 1,000) 100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500 1000 1500 2000 날로 높아지는 수출실적 이와 같이 초기의 안경 수출은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나 ‘국광 주식사’와 같은 일부 생산업체를 중심으로 출발였다. 실제로 국 내 부존자원(賦存資源)의 부족은 노동집약적 산업인 안경 생산업의 외 진출을 촉진시기에 충분 것이었다. 더구나 1960년대가 국가 경제적 차원에서 외 득이 곧 성장을 의미는 시대였던 만 외시장은 안경제조업체의 최대 목가 될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수출은 1964년부 시작되어 당 31,000달러를 기록 다. 지만 1965년에는 48,000달러를, 1966년과 1967년 두 는 각각 232,000달러의 수출 실적을 올림으로써 가 괄목 만 발전 을 이루었다. 그러던 안경제조업체는 1968년 이부 더욱 다양 목을 외시장에 내놓게 되는데, 귀금속제와 셀룰로이드제 등 의 안경와 선글라스 등에서 많은 실적을 올렸다. 실제로 1969년도 총 수출 604,000달러 중에서 셀룰로이드제 수출은 337,000달러로 전 수출량의 반 이상을 차지기도 다. 국가별로는 콩, 베남 등 지가 주 수출대상국이었으며 북미주, 영국을 아울러 아리카까지도 진출다. 1970년대 고도성장의 발을 다지기 시작 것이다. 049


1960년대 안경 수출실적 구분 수출 수량 금액(US$) 증감률(%) 수량 금액 1963 - - - - 1964 - 31,000 - - 1965 - 48,000 - 54.8 1966 - 232,000 - 383.3 1967 - 232,000 - 0 1968 405,764 361,000 - 55.6 1969 - 604,000 - 67.3 자료 : 국안경사대관 외 수요가 증가기 시작 국산 안경 국산 안경의 수출이 높아진다는 것은 외에서 국산 안경 의 수요가 증가다는 것을 의미는 바였다. 실제로 1967년 8월 7일자 ‘매일경제’에, 국에서 국산 안경의 수요가 늘고 있다는 기사가 게재되기도 다. 지만 이는 문제제기 또 고 있었다. 당시 국시장에 안경를 수출고 있던 국가로는 국 말고도 콩, 서독, 미국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랑스와 일본도 소량씩을 공 급고 있었다. 양적인 면만 고려면 국과 콩이 가장 우위였으 나, 국의 소비자들이 미국 및 서독제가 질이 우수고 최신유 을 선도다며 애용 에 수입업자들이 수를 썼다. 국과 콩에 서 ‘Made in Korea’나 ‘Made in Hong Kong’의 마 없이 만들어진 제에 ‘Made in U.S.A.’나 ‘Made in W.Germany’로 인쇄여 매 으로써 막대 이윤을 취 것이다. 국산에 대 인식이 부족기 도 거니와 인정받을 만 수준 또 아니었던 것이다. 지만 국 산 제의 가 미국 및 서독제과 유사 데 비 가격은 저 게 차이가 났기 때문에 날로 그 수요가 증가갔다. 국안경제조 70년사 050